아막성 전투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아막성 전투 阿莫城戰鬪 | ||
시기 | 602년 8월(음력) | |
장소 | ||
원인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40,000 명 | 1,000 명 + @[2] |
피해 | 공격군 궤멸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신라의 대승. | |
영향 | 신라에 대한 백제의 가열한 공세 지속. | |
1. 개요 [편집]
602년, 신라와 백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전투. 삼국 시대 후반부를 알리는 전투로, 이 전투를 시작으로 무왕 -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게 되고 신라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 전선에 대한 강화를 시작한다.
2. 배경 [편집]
진지왕이 의문의 폐위를 당하고 즉위한 진평왕은 각종 국가 기관 설치와, 전쟁 영웅을 측근으로 삼는 등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왕권 강화를 이뤄 나가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이전 진흥왕 시대에 흡수합병했던 가야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언급된다.
600년 봄 2월 신라와 임라가 서로 다투니, 천황이 임라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601년 3월 갑신 초하루. 오토모노무라지 쿠이(大伴連 囓)를 고려에 보내고, 사카모토노오미 아라테(坂本臣 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임라를 구원하라”고 조칙을 내렸다.[3]
3. 아막성 [편집]
현재 아막성은 남원시 아영면 아영 고원에 그 일부가 남아있으며 시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주요 위치 중 하나였으며 인근 4개 성을 거느린 모성(母成)이기도 했다. 실제로 발굴 조사결과 신라계와 백제계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주요 위치 중 하나였으며 인근 4개 성을 거느린 모성(母成)이기도 했다. 실제로 발굴 조사결과 신라계와 백제계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4. 전투 [편집]
4.1. 1차 공방전 [편집]
4.2. 2차 공방전 [편집]
4.2.1. 무왕의 분노 [편집]
4.2.2. 신라, 만인적(萬人敵) 등장 [편집]
아막성 인근에서 벌어진 양측의 전투는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해수는 천산으로 급히 후퇴했다. 신라는 추격을 하다 너무 깊숙히 들어갔다고 판단해 되돌아 가게 되는데,[5] 이때 천산 서쪽의 큰 연못 인근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해수는 신라군의 후위를 맡은 대감(大監) 무은의 병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공격을 지시했다. 이때 그러자 무은과 추격대 1천의 병력은 당황해 어쩔줄 몰랐고 심지어 지휘관인 무은은 백제군의 갈고리에 걸려 낙마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무은의 아들인 소감(少監)[6] 귀산[7]은 누군가가 어서 후퇴하자는 말을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이때 무은의 아들인 소감(少監)[6] 귀산[7]은 누군가가 어서 후퇴하자는 말을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4.2.3. 전투 결과 [편집]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삼국사기》 제4권 신라 본기 제4 진평왕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해수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 단신으로 돌아왔다.《삼국사기》 제27권 백제 본기 제5 무왕
신라군의 대승이었다. 4만에 달하는 백제군이 궤멸 당했으며, 총 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사비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해수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수는 없으나 왕이 분노하며 4만의 병력을 모아 보냈던 것임을 감안하면 대성팔족의 일족임에도 처벌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진평왕은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로 나아가 이날의 승리를 치하했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운 귀산과 추항은 온 몸에 난 상처로 인해 신라로 돌아오던 중 숨졌고, 진평왕은 이들의 시신을 보며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뤄주었다. 이후 귀산에게는 나마, 추항에게는 대사로 추증했다.
4.3. 3차 공방전 [편집]
17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苩奇)에게 명령하여 병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삼국사기》 제27권 백제 본기 제5 무왕
38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에 쳐들어왔다.《삼국사기》 제4권 신라 본기 제4 진평왕
5. 전투 이후 [편집]
6. 기타 [편집]
[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막산성(阿莫山城)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열전에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 자가 영(英) 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됐는데, 아영면(阿英面)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2] 일단 확인되는 병력으로 정예 기병 수천명과 무은이 이끌던 추격대 1천 명이 있다.[3] 일본서기는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띄고 있어서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신라와 백제가 왜에 두려움을 떨며 신하국 처럼 행동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쓰여 있다.[4] 실제로 진평왕 - 선덕여왕 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 양면전선이 형성되며 신라의 상황이 몹시 위태로워졌고 수양제에게 손을 벌려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요청한다. 그리고 수나라는 때마침 수 양제의 야욕과 맞물려 이를 받아들였고 ... [5] 다만 이때 무왕 본기의 기록과 귀산 열전의 기록이 상충된다. 무왕 본기에는 "승리로 인해 기세 등등했던 무은이 1천의 추격대를 이끌고 천산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신라의 무관 계급으로 17등 관위에서 12번째였던 대사(大舍)의 아래로 추측된다. 소감이라는 직책이 귀산 열전에만 언급되는데 귀산 열전의 기록을 근거해 대감(大監)의 자제 혹은 친밀한 사이에 주어지는 직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로 양분되어 있다.[7] 귀산은 아막성 전투 이전에 추항과 함께 원광법사에게서 화랑의 다섯 규율로 전해지는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일화가 있는 인물이다.[8] 신라가 급속도로 위축되던 시기로서,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압박한다.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